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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와 연예인 인터뷰텔링

[인터뷰텔링] 2023 WBC 감독 이강철 (3), 인생을 배운 2군시절과 이미지 트레이닝

by 드림비 2023. 3. 10.

이강철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국대표팀 감독
이강철 선수, 언더드로우 피칭

뜻하지 않은 시련, 그리고 재기를 꿈꾸며

1999년, 하와이 전지훈련을 마친 뒤 무릎 전박 십자인대 파열 선고를 받은 이강철은 그 해 4월, 마침내 무릎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 이젠 당신 몫인 거 알죠? 당신이 재활운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찍 재기하거나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젠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노력은 이강철, 그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노력을 해서 되는 일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열심히 노력했고 다행히 재활은 성공적이었다. 11월부터 재활운동을 끝내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코리안 시리즈 우승에 목말라하던 삼성에서 3년간 8억이라는, 그때만해도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의 거액으로 그를 원했다. 사실 89년에 프로에 데뷔한 후 이강철은 줄곧 에이스급 투구기량을 뽐내며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재기의 희망을 안고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인생을 배운 2군 시절

하지만 재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FA 첫 해니까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같아요. 특히 팀을 이적했기 때문에 새로운 팀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죠. 그런 이중 삼중의 심적 부담감 때문에 욕심만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죠."

결국 2000년 5월, 이강철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언론에선 그런 그를 '이강철, 2군 추락'이라고 표현했고,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제 이강철의 시대는 갔다'고들 말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돈만 버렸다. 돈만 받아먹고 제 값도 못하는 놈'이라고 뒤에서 수근거리기도 했다. 무릎 부상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누구보다 이강철, 그 자신이 처음엔 2군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조금은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천하의 이강철'인데....어린 2군 선수들과 뒤엉켜 훈련한다는 게 부끄럽게 여겨졌다. 게다가 2군은 체력적으로도 1군보다 훨씬 고달픈 일정이었다. 1군은 게임이 자주 있으니까 오후 2시쯤 여유 있게 운동장에 나가면 되지만, 2군은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계속 훈련의 연속이었다. 밥 때 되면 밥 먹고 나머지 시간은 강도 높은 훈련 일정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한 이후로 그렇게 운동하는 건 처음이었다. 시합 있는 날은 시합하고 또 저녁에 운동을 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력이나 기량 향상을 꾀하기 어렵고, 또 2군 선수들의 근성도 약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나 시련 앞에서 언제나 그러했듯 이강철은 곧 담담히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아니잖는가? 자신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맨 주먹으로 오직 노력 하나만으로 헤쳐 온 그였다. '그래, 난 이제 2군 선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화려했던 순간을 돌아보며 현재의 처지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내가 왕년에 한가닥 했던 몸인데....'라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옛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바로 내가 한물갔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안 그래요? 옛날에 나 잘 낫었다 하면, 지금은 못 낫다는 얘기잖아요. 그러기 싫었어요." 

 

최고의 순간을 돌아보며 아쉬워하기 보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이강철은 이제까지 자신을 이끌어왔던 그 행운을 믿어 보기로 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신은 잘 될 것이라는 그 믿음을 다시 한번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는 이강철만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순간의 이강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원동력이었다. 

 

꿈을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룬다

"여기는 잠실 야구장! 해태와 롯데의 한국시리즈 7차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강철 투수,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9회 말 투아웃 상황. 피 말리는 접전에 접전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주자는 2, 3루. 타석에 선 타자는 홈런타자로 이름 높은 메이저리그 출신의 용병이었다.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의 풀 카운트 상황. 선수는 물론 구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도 일제히 이강철을 주목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꼴깍,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만한 침묵.... 강철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볼을 든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갔다.

"이강철 선수 와인드 업! 던졌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샤우팅이 울리고 난 뒤 "와!!" 하는 파도와 같은 함성이 잠실 야구장을 뒤흔든다. 포수가 기쁨에 넘쳐 강철에게 안긴다. 덕아웃과 그라운드에 있던 동료들이 일제히 강철에게 몰려와 그를 얼싸안고 볼을 비비고 너 나 할 것 없이 그의 등을 두드린다.

"네!! 스트라이크 아웃입니다. 삼진 아웃으로 막아내는 이강철 선수!! 해태가 이겼습니다.!!  올해 한국시리즈 패권은 해태가 차지했......."

"형..... 강철이 형!!! 뭐 해?"

"......... 어? 어?"

행복한 생각에 잠겨있던 강철은 옆자리의 후배가 흔드는 바람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원정 경기 때문에 이동 중인 구단 버스 안이었다. 동료 몇몇은 잠에 빠져 있었고, 몇몇은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 프로야구 선수. 때문에 많은 선수들은 그 버스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자신의 컨디션을 조절하며 운동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곤 한다. 하지만 이강철은 버스 안에선 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긴장이 돼서 잠을 질래야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생각을 하곤 했다. 최고의 순간, 최고의 스포트라이트가 될 만한 게임을 머릿속에서 그리곤 했던 것이다. 그중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이 바로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어 환호성을 지르는 광경이었다. 이런 게임에 나가서 이런 상황이면 이렇게 해야지...... 점차 공상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한 트레이닝이 되어갔다. 남들은 그가 한국시리즈 승리투수가 되는 상상을 한다고 했을 때 '꿈이 야무지다'고들 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기면야 얼마나 좋겠냐'고들 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이강철에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그가 그해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것이다. 

"진짜 좋았죠. 아마 내 생애 최대의 기쁨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거창한 상을 받은 것도 좋았지만 그것보단 무엇인가를 절실히 바라고 꿈꾸다 보면 그 꿈이 이루어진다는 증거를 만난 셈이라서 뛸 듯이 기뻤어요."

인생 최고의 순간,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이미지 트레이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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