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김형석
혼을 내지 못하는 작곡가, 프로듀서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함춘호의 대답은 그때처럼 여전히 짧고 담담했다.
"그냥. 니가 되게 연습도 악바리처럼 할 것 같아서. 음악도 끝까지 할 것 같고..."
담백하고 멋진 사나이 함춘호의 가르침으로 그는 이후 순조롭게 녹음실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그 녹음실에서 그는 일 년에 50여 장에 가까운 가수들의 앨범에 참여했다. 아마도 그때가 그가 음악을 해온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한민국 대중 가수들의 노래들을 가장 많이 듣고, 연주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시간은 고스란히 그 후 그가 작곡을 하고, 프로듀서가 되어 앨범을 만들고, 가수를 키우는 것을 비롯해 그의 모든 음악 생활을 뒷받침하는 든든하고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 되었다. 지금도 그는 마치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모든 공부의 기본이듯 음악을 많이 듣고, 만드는 것 또한 음악가에게는 최고의 공부라고 생각한다.
작곡가의 길, 그리고...
콘서트와 스튜디오 세션을 했던 시기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많이 배웠던 값진 시간이었다. 그 시절, 그는 학교에서 거의 클래식에만 집중되었던 지식과 감각을 대중음악에 온통 쏟아 부었다. 또한 스펀지처럼 대중음악이라는 커다란 강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을 흡수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거부감 없이 그저 음악이라면 뭐든지 배우고, 받아들였던 그 시간은 그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작곡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능력은 당시 가요계의 <BIG 3>라고 불렸던 신승훈과 김건모, 솔리드를 비롯해 수많은 가수들과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그들을 대표하는 발라드, 댄스, R&B 등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녹음실에서 작업을 하면서 차곡차곡 배우고 익히며 응용해 왔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김형석은 90년대 중반 이렇듯 최고의 가수들과 작업을 하고 많은 히트곡들을 만들어 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감과 자만심을 구별할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그는 젊었고, 그의 길을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충분히 성공을 한 사람이었다. 그를 모델로 작곡가가 되기를 꿈꾸는 후배들이 생겼고, 음악계에서는 물론 가수들과 방송국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처음 꿈꾸던 것 이상을 누리는 생활에 그는 스스로 만족했다. 불과 얼마 후에 만족과 자만, 그것이 작곡가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를 알았더라면 아마 절대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 중에서 또한, 잘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더욱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엄연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김형석은 그때까지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못할 때 치러내야 하는 혹독한 댓가에 대한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지했던 김형석의 30대 초반을 갉아먹었던 대 사건이 아주 살그머니 다가와 있었다.
화려한 출발
지금은 전설처럼 가요계 최대 호황기로 남은 1990년대 중반은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지금 영화 산업이 그러하듯이 소위 '되는 장사'에는 대기업들도 앞다투어 투자를 했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사업은 음반이었고, 음반 사업을 시작한 대기업 사이에는 스카우트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 작곡가로서 대중음악의 한 가운데 서있는 사람으로서 그 역시 한 대기업으로부터 프로듀서 제의를 받았다. 그는 구름 속에 붕 떠오른 당시의 음반 시장에서도 가장 한껏 부풀어 오른 커다란 풍선이었던 것이다.
계약금은 선불로 24억. 2년 동안 신인가수 앨범 5장을 발표하는 것. 1996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이었다. "과연 지금 나의 위치에서 괜찮은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긴 고민 없이 이 엄청난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마침내 계약은 성사되었고, 신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며 그는 작곡가에서 '프로듀서 겸 작곡가 김형석'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반짝거리는 시 몇 편 발표한 시인에게 판매부수와 인지도만을 빌어서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출판사를 차려준 것과 다름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일이었다. 김형석이라는 사람이 만든 곡 중에 몇 곡이 히트했나만 보고 사업적인 능력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커다란 회사의 운영권을 준 것이고, 그는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사회 경험이 부족하고 조금은 우유부단하고 거절을 못하는 그의 성격을 탓하기에 앞서, 앞뒤 생각 없이 '계약'을 수락한 것은 분명 큰 실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는 서른 살. 그동안 작곡가로, 연주자로 대중음악의 중심을 걸어오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새롭게 의지를 다지고 새로운 도전에 응하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중요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경험도, 지식도 없이 막연한 상황이었지만, 그때는 성공에 대한 자신만큼은 대단했었다. 10년 가까이 음악을 해오면서 얻은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이것이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출발은 이렇게 화려했지만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관여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숫자에 희박하고 비즈니스적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 사업은 정말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곡을 쓰고, 연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커다란 책상 앞에서 하루에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들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란 신인가수 발탁에서부터 음반 제작, 유통, 홍보는 물론 작곡까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발탁한 가수를 스타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20년 가까이 음악을 해오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프로듀서가 되고 나니 한꺼번에 보였다. 방송국 사정이며, 홍보, 마케팅, 프로모션까지. 그는 한 명의 스타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야 하는지를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품고 있던 작은 자만, 즉 곡만 있으면 스타는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도 그는 경험을 통해 하나씩 철저하게 알아갔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불면의 밤과 시행착오의 진통을 겪은 후에 마침내 '프로듀서 김형석'의 이름을 단 앨범이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수개월 동안 총력을 기울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앨범은 총 8천장 나갔고, 가수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처참하리만큼 형편없는 결과였다. 첫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동안의 히트곡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내 곡이 좋아서' 앨범이 성공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 자신도 놀랐지만, 그를 스카우트한 기업은 더 황당해했다. 첫 앨범 제작의 실패를 통해 그는 가수와 매니저, 제작, 유통, 홍보 이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잘 돌아갈 때만이 스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노력으로 만들어진 스타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대중들은 스타에 대한 사랑으로 스타가 부르는 노래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비싸게 주고 얻은 교훈이었다.
결국, 그는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원준과 계약을 맺고 몇 장의 앨범을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이었고, 회사측도 만족했다. 그것으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우게 되었다.
지독한 시련, 차라리 이 술잔이 독이라면...
그의 서른을 갉아먹은 지독한 좌절, 그것은 거기서 그렇게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더욱 세차게 밀려들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쓴 웃음과 함께 울음을 삼키듯 서른을 앓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그는 모든 일들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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