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텔링] 작곡가 김형석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
부모님 말씀보다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더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으로 그는 처음으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을 했다. 지금도 그렇듯이 그 시절에도 대학은 19살 어린 나이의 그에게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음악 생각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고, 그것이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것보다 옳다고 자신했다. 그때 그에게 있어서 대학이란 입학과 동시에 직업이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부모님 뜻대로 전공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그의 인생은 음악과는 영원히 멀어질 것이라는 초조함도 있었다.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처음으로 겪는 인생의 큰 결심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는 부모님 몰래 국문학과나 영문학과가 아닌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지원했다. 원서를 접수할 때까지 들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그는 붙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실기 시험이 학력고사 점수만큼이나 중요한 음악 교육과에, 지원하고 나서야 뒤늦게 혼자 나름대로 피아노를 급히 연습한 것은 합격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험결과가 발표되고 낙방이 확정되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고,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서야 아들이 음대에 지원했음을 알게 된 그의 부모님의 실망은 대단하셨다. 돌이켜 보면 믿었던 아들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을 느끼셨던 것 같다. 그가 평소에 말썽을 종종 부렸거나 부모님의 말씀에 반항을 했다면 충격이 덜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이 더 컸던 것이다.
난생처음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을 알았고, 그것을 선택했지만 그는 첫 단계에서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하지만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입시에 낙방한 그 해 겨울, 음악에 대한 간절함과 부모님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가출을 시도했다. 그때 그에게는 패배감과 고집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기로 똘똘 뭉친 그가 간 곳은 교회의 지하실 방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2주간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음악을 꼭, 반드시,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담처럼 음악에 대한 고집은 그의 작은 승리로 끝났다. 그 후 일 년 간, 그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학업과 피아노를 병행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수년간 음악을 해온 다른 친구들과 달리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지 않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음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와 피아노에 묻혀서 지내는 동안, 1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마침내 1985년, 그는 한양대 작곡과에 합격하는 기쁨을 안게 되었다. 한양대학교 작곡과 85학번 새내기. 이것이 그가 소속된 울타리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이었다. 대학생이 된 것을 마냥 즐거워하기에 그는 너무 숫기 없는 아이였다. 광주에서 홀로 서울에 올라온 덕분에 아는 사람도, 변변한 친구도 없던 그에게 소속감을 주는 것은 오직 그의 학번, 그의 학교, 그의 전공이라는 울타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만큼은 그도 혼자라는 것을 잊을 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다.
유재하 선배와의 운명적인 만남
모든 것이 마냥 신나기만 했던 1학년 봄, 그는 운명처럼 가수 유재하를 만났다. 당시 유재하는 이미 가수로서 후배들 사이에서 노래를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그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를 비롯해 주옥같은 유재하의 노래를 너무나 좋아하는 팬이었지만, 그때까지 같은 학교라는 것만 알았을 뿐 얼굴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십 수년 전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유재하를 만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교정에서였다고 한다. 정말로 우연히. 그때 그는 신입생이었고, 유재하는 학점 미달로 인해 예정대로 졸업을 못하고 9학기 째 학교에 다니고 있던 '어렴풋이' 얼굴만 아는 선배였다. 그 선배는 교정에 있던 그에게 합창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는 "저 선배는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작곡과이면서 합창실도 모를까?" 하며 신입생 특유의 조금은 새침한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가 그 '유재하'와 동일 인물일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는데 '유재하'라는 교수님의 부름에, 길을 물었던 '그 선배'가 '네'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을 계기로 그는 유재하 '선배'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간 유재하의 음악과 노래 역시 지금 음악을 하고 있는 그에게 지금도 아니 영원히 질리지 않는 고전이라고 한다.
정말 좋아하는 일
3학년이 되던 해, 그는 군대에 가기 위해 휴학을 신청했다. 군대에 가기까지는 다소 시간 여유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유학을 갈 것인가. 과연 음악으로 평생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이런저런 고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물론, 그때까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근처 카페에서 연주를 하는 것을 비롯해,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며 음악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음악으로 평생을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제껏 아르바이트로 했던 일들이 평생의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걱정하셨던 것처럼 그때는 음악을 업으로 삼기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적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처음 음악을 반대하셨을 때부터 당신 아들이 대중음악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있는 대중음악이란 다방의 DJ나 레스토랑의 시간제 피아노 연주자와 같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나의 등을 밟고 올라 만리장성을 넘어라
결국 군대를 제대하고 졸업반이 되어 진로 상담시간이 왔을 때, 대학원 진학을 권하시던 박영근 교수님께 그는 영화음악을 하고 싶다는 뜻을 비치며 이해를 구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영화 <Once Opon A Time in America>에서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은 뒤, 막연히 저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긴 했지만 분명 교수님은 반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클래식을 전공하는 학생에 대한 규제가 지금보다 훨씬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교수님의 입에서 떨어진 말씀은 불호령이나 반대가 아닌 진심 어린 충고였다.
"쉬운 길이 아닐 것이다. 영화음악을 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인데 정말 괜찮겠니?"
어떻게 보면 단지 치기 어린 마음에 지나지 않을 그의 이야기에 진심 어린 따뜻한 충고를 해주시는 교수님께 그는 그저 "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종종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날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교수님의 많은 말씀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말씀이 있다고 했다. 아련히 옛 기억을 회상하며 그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교수님이 해주셨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의 손을 잡고 만리장성까지 가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의 등을 밟고 올라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끝없이 길고 거대한 미래의 날들 앞에 한없이 작고 초라함을 느끼던 그에게 교수님의 이런 이해와 응원이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훗날 그가 작곡가가 되고, 프로듀서가 됐을 때 훌쩍 성장한 박진영을 라이벌 회사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날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늘 가슴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박진영은 데뷔하기 이전부터도 워낙 친했고, 데뷔 후에도 1, 2집을 함께 만들며 고생도 기쁨도 함께 했었다. 후에 그가 제작자가 되었을 때, 동생처럼 아끼던 박진영을 데려오고 싶은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회사가 있었을 때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박진영을 보낼 수 있었다.
혼을 내지 못하는 작곡가, 프로듀서
그렇게 하늘을 노랗게 물들였던 녹음실에서의 아픈 기억은 이후로 김형석에게 버릇 하나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노래를 듣고 많은 사람의 연주를 듣고 있지만, 연주가 이상하거나 미숙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야단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일은 정말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숙한 사람을 대할 때 그는 야단을 치는 대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칭찬을 해줄 수 있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막 음악을 시작했을 때, 그의 곁에 함춘호와 같은 좋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버릇에 길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나침반, 함춘호!"
녹음실에서의 아픔이 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함춘호에게 물어보았다.
"형, 그때 왜 날 데리고 다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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