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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와 연예인 인터뷰텔링

[인터뷰텔링] 작곡가 김형석 (1) 나의 등을 밟고 올라 만리장성을 넘어라

by 드림비 2023. 3. 1.

2013년 SBS 가요대전에 참석한 작곡가 김형석(이미지출처: 한국일보)


작곡가 김형석은?

대중음악 작곡가이며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성시경, 보아, 박진영, 김건모, 솔리드, 박미경, 김원준, 신승훈 등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앨범은 없다고 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남자셋 여자셋>, <올인>, <느낌> 등의 드라마 음악과 <엽기적인 그녀>, <우리형> 등의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그는 1966년생이며, 한양대학교 음대 작곡과 85학번이다. (2005년 당시 소개글임)

 

첫 녹음실에서의 기억

"너 가라"

제작자의 목소리가 귀에 떨어진 것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하얀 봉투가 들어왔다. 그 순간 눈 앞에서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말했다.

"그만 가보라니까."

"다시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는 간신히 배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기에 책앰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리는 대답은 그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할 뿐이었다.

"밖에 건반 연주자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럼 녹음을 못 끝냈으니 이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이를 악물고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다.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이 돈 받고 이제 그만 가 봐."

한 마디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목소리. 결국 그는 돈을 받아들고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물 밖에 주저앉아 세상에서 가장 쓴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콘서트 세션만 하던 그가 드디어 정식으로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게 될 기회가 생겼다. 김광석(가수 고 김광석)에게 준 <너에게>라는 곡의 데모 테이프를 들은 담당자가 그를 찾은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콘서트 장에서 연주를 해보긴 했지만 녹음실은 처음이었다. 첫 부름을 받은 작곡가이자 건반 연주자로서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관계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었다. 

 

가기 전부터 잔뜩 긴장한 그는 녹음실과 콘서트 장의 기본적인 차이조차 모른 채 "여기서 한번에 실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어리석은 강박 속에서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다. 마음속으로 "잘해야 한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에 맞춰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녹음실 밖에서는 가수, 매니저, 편곡자, 엔지니어, 어시스트를 비롯해 음반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그와 그의 실력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앞으로 그의 음악 인생을 결정하게 될 것을 알리는 '그의' 음악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터질 듯한 긴장 속에 있던 그의 머릿속은 하얀 도화지처럼 텅 비어버렸다. 

 

 

녹음은 합주의 예술이다. 클래식으로 말하면 솔로가 아닌 오케스트라. 가요를 녹음하는 스튜디오에서 유일한 솔로는 가수일 뿐이다. 물론, 가수 역시 악보대로 노래를 한다. 그렇다면 세션 역시 마찬가지다. 정해진 악보대로 각자의 파트를 연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이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해서 세션일을 해 오면서 한 번도 밴드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 녹음실과 콘서트의 세션은 전혀 달랐다. 열광과 흥분이 가득한 콘서트에서는 2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그는 그저 신나게 연주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토록 잘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떨리는 마음으로 임한 녹음에서 그는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도 못하고 정신없이 헤맸던 것이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익숙한 그 멜로디에 맞춰 모든 악기의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앞에 놓인 키보드로 베이스를 비롯해 기타까지 정신없이 돌아가며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이 들리지 않아 정신을 차려 보니 유리로 된 벽 밖으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랬거니 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도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자 얼굴에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수와 상황을 알았지만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한 번 잃어버린 리듬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실수는 악몽처럼 거듭되기만 했다. 

 

녹음은 그렇게 중지되었다가 반복하기를 계속했고, 그는 식은 땀을 흘렸다. 그에게서 비롯된 거듭되는 실수 때문에 덩달아 다른 사람들까지도 결국 두 시간 남짓 고생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그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이 지연되자 녹음실 밖에서 손짓으로 그를 불러냈던 것이다. 너무나 창피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갖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지금껏 해왔던 모든 것들, 그의 의지로 음대에 진학하고, 클래식을 공부하고 대중음악을 선택한 일과 그동안 세션으로 활동했던 일들이 꿈처럼 눈앞에서 지나갔다. 그 순간 스튜디오 녹음실 앞에서 자신의 모든 꿈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그가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파란 하늘은 푸슬푸슬 무너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

그는 1966년 9월 27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음악가로서는 운 좋게도 언제나 음악과 함께하는 아니,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께서 음악 선생님이셨고, 어머니 또한 피아노를 전공하시고 집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랐다. 한 시인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지금의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음악에 풍요로운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대입 수험생이라 연주는 항상 콩쿠르나 시험을 노린 클래식 곡들이었다. 아기들이 자라면서 딱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칫솔로 이를 닦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베토벤이며 모차르트의 곡들에 익숙해졌다. 또, 자연스럽게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도레미를 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가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직접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다. 너무 어려서부터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어머니의 제자가 되어 때때로 회초리로 손을 맞아 가며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한 번도 지루하거나 꾀를 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를 마치자마자 학원으로 가지 않았던 것에 더 큰 기쁨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아픔없는 시련

하지만 그가 진로를 결정하기까지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참 피아노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을 무렵, 그의 부모님은 일방적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말라며 레슨을 중지하셨다. 초등학교 때보다는 중학생으로서 해야 할 공부가 피아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 이상 집에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고, 교회에 나가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초등학교 시절처럼 매일 집에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치는 것으로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오히려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클래식 대신 훨씬 다양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아마도 그때가 그가 처음으로 대중음악의 다양한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시기였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유행하던 가요부터 한밤 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팝송까지 그는 그가 듣고, 또 치고 싶은 곡들을 자유롭게 연주했다. 비록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는 서울과 달리 음악회와 같은 문화적 혜택이 늦었다. 뭔가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라디오뿐이었다. 그는 라디오에서 들은 음악들을 다시 피아노로 연주하며 큰 재미를 느꼈다. 그저 마냥 즐거웠다. 

 

큰 우산

녹음실에서 그렇게 쫒겨나 한동안 주저앉아있던 김형석은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춘호형이었다. 기타를 맡고 있던 함춘호. 떠밀리듯이 쫓겨 나오는 김형석을 따라 나왔던 것이다.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기도 하고, 떼를 쓰고 싶기도 한 마음이었다. 

"형, 나는 음악... ....못할 것 같아."

입 밖에 나온 말들이 순간 사실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는 절망이 가득 차 버렸다.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유일한 일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그저 그의 얘기를 묵묵히 듣던 함춘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엔 다 그래. 앞으로 너, 나 다니는 녹음실마다 따라 다녀라."

그날 이후 김형석은 함춘호를 따라다니며 세컨드 건반 주자로서 녹음실의 분위기들을 몸으로 익혀 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경험을 통해 함춘호는 그에게 녹음실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고 적응을 시켜주는 백신 주사를 놓아주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그는 함춘호라는 고수 밑에서 녹음실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김형석은 그러한 수련을 통해 녹음실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

그의 아버지는 당신이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셨음에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음악의 길이 안정과 명예를 보장해 주지 않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계셨다. 고지식하고 완고한 분이셨던 아버지는 장남이자 장손에 독자인 아들에게 보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길 바라셨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 자식이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그는 그때 열아홉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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