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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와 연예인 인터뷰텔링

[인터뷰텔링] 작곡가 김형석(마지막회) 나의 등을 밟고 올라 만리장성을 넘어라

by 드림비 2023. 3. 3.

김형석과 박진영 (이미지 출처: 탑스타뉴스)


[3편에서 계속]

작곡가 김형석

 

지독한 시련, 차라리 이 술잔이 독이라면...

1998년 겨울, IMF가 터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업들이 부도가 났고, 사람들의 삶은 뿌리부터 휘청거렸다. 가요계에도 예외 없이 불황의 바람이 불었고, 때마침 엄청난 속도로 보급된 인터넷은 불과 1~2년 전의 가요시장을 먼 옛날의 꿈과 같이 아련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만들었다. 우려는 했지만, 그와 계약한 기업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굴지의 대기업이었기에 설마 부도가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기업은 도산을 했고 그 불똥은 당연히 그에게도 튀었다.

 

하루라도 빨리 잊어버리고 싶던 그 계약은 끝내 법적 소송으로까지 비화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4억이라는 숫자는 오히려 족쇄가 되었고, 출신이 전혀 다른 작곡가의 느닷없는 성공은 다른 제작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조차 힘들어지자 자연히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도 줄어들었고, 부러움과 영광의 대상이었던 순간은 까마득한 일처럼 잊혀졌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온통 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 맞서야하는 끝없이 길고 지루한 법정 소송이었다. 주변에서 그를 도와줄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실은 오직 서류와 계약서 상에 존재하는 문자들 속에서만 존재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

기업이 휘청거리자 이제까지 그나마 그와 얼굴을 맞대며 사업을 논의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바뀌었다. 이젠 그를 돌아봐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와 회사 앞으로 투자된 확고부동한 숫자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투자되었던 그 돈을 김형석이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변명해야 했다. 재판정에 갈 때마다 그는 한 장의 앨범이 발매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예산이 집행되는지를 매번 새로운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만 했다. 수익을 올리며 효자 노릇을 했던 김원준의 앨범조차 김원준이 기성 가수라는 점이 계약 내용과 다르다는 이유로 매도되어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무실과 법정, 공연장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나서 지친 밤이면 마치 독약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디쓴 술을 들이켰다. 김형석에게는 그렇게 더 이상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표현할 수 조차 없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마침내 2003년, 그는 무죄를 선고받으며 지루한 법정 공방이 끝났지만, 세월을 너무 빨리 겪은 머리칼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오랜 소송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이 있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인생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잃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 바닥까지 탈진해 버린 감수성과 정신력일 것이다. 사업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싸우는 동안 그의 감성은 점점 고갈되었다. 음악은 창조의 예술이다. 비록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4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아야만 하는 공식에 갇힌 예술이라고 할지라도 작곡가는 창조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수표 위에 써진 숫자나 계약 문서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는 감수성의 상처를 보상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 그중에서 잘하는 일이 뭇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대가치고는 차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뿐이었다. 


 

김형석이 박진영을 키웠다?

"따르릉"

늦은 밤이었다.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취기가 오른 목소리의 박진영이었다. 

"형, 비가 나하고 형석이 형이 라이벌이 아니냐고 묻는데? 형이 직접 얘기해줘요."

그렇게 얘기하며 전화를 비에게로 건네주었다. 김형석은 비의 질문을 받고 그런 오해도 있을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다 같다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고통에 대한 연민을 항상 느끼고 있어. 그래서 라이벌이 아닌 보듬어 주고 싶은 후배이고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것을 보면 하나로 묶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박진영, 성시경, 신승훈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감을 가진 스타들을 그와 하나로 묶어 '김형석 사단'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마도 김형석 사단이란 한 번쯤 그의 곡을 부르고 히트한 앨범을 가진 가수며, 스타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때로는 그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보니, 그가 만든 곡을 불렀던 그들이 김형석에게 소속된 가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와 그의 회사에 계약으로 묶인 김형석 사단의 가수는 김조한과 성시경을 빼면 사람들이 단박에 알아볼 만큼 화려한 스타는 없다. 나머지는 모두 몇몇의 준비된 혹은 준비 중인 신인가수들이다. 다시 말해 김형석 사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진한 우정과 그 밖에 끈끈한 인간관계로 얽힌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있을 뿐이다. 

 

최근 몇몇 사람들이 박진영이 프로듀서로 성공하고 나자 라이벌 의식이 생기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김형석이 박진영을 키웠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그는 가수를 발굴해서 스타로 만들어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박진영이나 성시경 같은 경우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운 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그가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준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그들과 김형석의 인간적인 유대감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20년 후를 바라보며

그의 꿈은 언제나 하나다. 죽는 날까지 곡을 의뢰받을 수 있는 작곡가가 되는 것. 대학이 그에게 주는 의미는 언제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만약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학시절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미숙했던 '그때도' 좋았지만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좀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가끔 학교에 간다. 스무 살 때는 걷고 뛰면서 다니던 학교를 이제는 차를 타고 간다. 차 안에서 보는 학교는 그때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다. 운동장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건물이, 그리고 지하에는 지하철이 들어와 있고, 편의점에 패스트푸드점까지 없는 것이 없다. 학교는 그의 기억에서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김형석처럼, 책임에 대한 의무감 대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위치에 있는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공기 때문일까? 그의 기억에서 멀어지는 만큼 학교에는 놀라울 만큼 잊히지 않는 학교만의 내음이 있는 것 같다. 그 내음을 맡아보고 싶어서 그는 마음이 자유롭고 싶을 때면 학교에 가서 그저 가만히 공기를 마셔보곤 한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꼬박꼬박 저금하듯 음악 공부를 즐겁게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평생의 재산이 되었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런 우연과 필연의 인연은 지금의 김형석을 만들어 주었다. 끝

 

 

다음 편에는 <영화배우 박중훈> 편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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